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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사랑은 노동 / 이라영

HANIM 2014. 10. 20. 23:18


[한겨레]

배우 최진실이 보고 싶은 계절이다. 신인 시절 최진실을 특히 유명하게 만든 한 광고 대사가 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이 말이 허구임을 최진실도 알았을 것이다. 여자 하기 나름? 이는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책임을 주로 여성에게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애인과 화해하고 싶어 꽃다발을 들고 온 남자가 잠시 후 꽃을 들었던 손으로 일가족을 차례로 살해했다. 지난주에 일어난 광주 일가족 살인사건이다. 살해 동기는 '무시해서 홧김에'였다. 익숙한 동기다. 아내나 애인을 살해하는 남자들의 살해 동기는 툭하면 '무시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순간적으로, 홧김에…'라고 한다.


예전에 가정폭력에 관한 한 언론의 글을 읽다가 이런 마무리를 보았다. "(여자들도)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다. 죽기 싫으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라는 조용한 협박이 통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자존심이 아니라 유독 남자의 자존심이 중요하다.

가부장제와 이성애 관계 속에서 여성은 거의 일방적인 감정노동을 한다. 가족을 위해, 남자를 위해 행해지는 그 노동은 모성애나 애교로 불리며 마치 자연스러운 여성성으로 왜곡되었다. "여성들은 다른 자원이 없고 재정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감정을 남성에게 주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들에게 없는 물질적 자원을 받는 방식으로 감정을 자산으로 활용해 왔다."(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267쪽)

여성이 이 노동을 멈출 때 주로 '곰'이 되고, 그 곰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무시했다'와 같은 말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는 '맞을 짓'이 된다. 기 센 여자는 부정적 표현이지만 남자의 기는 살려야 한다. 이를 합리화하는 말이 '여자 하기 나름'이다. 여성은 감정노동의 주체지만 늘 가만히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집(사람), (어머니)대지, 항구, 꽃에 비유된다. 진부하고 지겨운 비유. 여성은 안식처이거나 아름다운 볼거리다.

서비스직에서 여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감정노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보는 우리의 관념 때문이다. 그 관념 때문에 여성은 실제로 감정노동에 훨씬 숙련된 노동자로 성장한다. 이는 여성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 부단히 훈련된 결과다.

나는 <한겨레> 토요판에 실리는 연애와 가족에 대한 글을 꼬박꼬박 읽는다. 뭘 그런 것까지 열심히 읽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런 것'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교양'을 주제로 한 어떤 책에는 여성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은 몰라도 될 교양,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지식으로 분류된다.

중요한 뉴스와 중요한 교양은 뭘까. 김정은의 행방? 아시안게임의 경제 효과?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의 중요한 문제와 나의 중요한 문제가 꼭 일치하진 않는다. 일상에서 인간관계는 언어와 함께 우리 일상의 고통과 가장 밀접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등한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계와 언어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이는 하찮은 문제지만 감정노동의 고통이 일상인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늘 중요한 화두다. 그 노동의 헛헛함을 달래려 여성들은 때로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비현실적 인물로 눈을 돌린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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