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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은 돈 문제이자 가치관의 문제

HANIM 2014. 9. 17. 18:49


"복지를 왜 돈으로만 보고 생각하는지 안타깝다. 따뜻한 사회적 관심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박근혜 의원이 했던 말이다.

2011년 초 여야는 복지논쟁을 벌였다. 당시 나는 '복지는 세금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거짓말이다'고 강조하며 보편적 복지와 부자증세를 민주당의 핵심정책으로 관철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그 시기 박근혜 의원은 복지국가 기본법을 발의하면서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고 말하는 등 복지국가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복지를 돈으로 보지 말라는 박근혜 의원의 말은 대통령이 된 뒤 기초연금 공약 파기 과정에서 두 가지 허점으로 드러났다.

첫째 복지가 따뜻한 마음이라는 말의 한계다. 따뜻한 마음이란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뜻한다. 복지를 동정으로 하면 낙인효과가 생긴다. 이 정부의 기초연금 재정 추계위원장 김모 교수가 '65세가 돼 기초연금을 받으면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다'고 말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학교 무상급식에 대입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당시 오세훈 전 시장이나 한나라당이 주장했던 대로 70% 아이들에게만 급식했다고 생각해보자. 교실은 돈 내고 밥 먹는 아이들과 공짜 밥 먹는 아이들로 구분됐을 것이 틀림없다.

기초연금, 무상급식, 무상보육, 중증질환 국가보장 등의 정책은 지도자의 자비심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에서 나온다. 모든 국민은 이를 누릴 권리가 있다. 헌법에 다 나와 있다.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국가는 이를 보장하라. 헌법 34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 노인복지 향상의 의무를 진다고 돼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하나는 세계 최고의 노인 빈곤율이다. 국민 중간 소득의 절반에 미달하는 상대적 빈곤층이 무려 45%에 달한다. 먹고살 만한 나라 OECD 빈곤율 13%에 비해 세 배도 더 높은 수치다. 엊그제 UN이 발표한 통계는 더 참혹하다. 노인복지 수준이 91개국 중 67위이고, 소득지수는 91개국 중 90위였다.

둘째 돈 없이 복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선 때 박 후보는 '모든 어르신에게 20만 원씩 드리겠다'는 공약과 함께 이를 실현할 예산으로 4조 원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산수만 갖고도 금방 앞뒤가 어긋나는 게 드러난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600만 명 곱하기 20만 원 곱하기 12개월 하면 14조 4천억 원이란 계산이 금방 나온다. 2013년도 예산에 70% 노인에게 기존의 10만 원 노령연금을 주기 위해 4조 원이 계상된 것을 셈에 넣으면 10조 원이 추가로 더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조 원 갖고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씩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은 국민을 속인 것에 다름없다.

모든 어르신에게 20만 원씩 드리는 기초연금은 하늘로 날아가는 돈이 아니다. 20만 원은 어르신이 국밥을 사드시거나 미장원에 한번 가거나 손주들 용돈으로 대부분 소비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가장 부족한 내수를 활성화하고 시장을 키우는 길이다. 젊은 시절 생산활동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던 어르신들이 이제는 적극적인 소비활동을 통해 다시한번 경제성장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복지성장론인 셈이다.

남은 문제는 재원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나 긴요하지 않은 예산을 줄여 재원을 충당하겠다는 말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게 아니다. 우선 재벌 감세를 철회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이뤄진 80조 원의 재벌 감세만 되돌려도 기초연금 재원은 충분하다.

작년에 이익을 낸 중소기업 30만 개의 실효 세율이 13%인데, 10대 재벌 대기업의 실효 세율이 12%였다. 누가 봐도 조세 정의에 어긋난다. 30대 재벌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400조 원에 달한다.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이나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하는 것이 '정의' 아니겠는가?

작년 대선에서 국민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의 길로 가는 것에 동의했다고 생각한다. 여야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내가 대통령이 돼야 복지국가를 잘할 수 있다고 국민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더 능동적으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재원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국민대타협위원회'를 통해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를 공론화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서는 법인세나 소득세의 실효세율을 높이는 방안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이 이뤄져야 한다. 합의가 된다면 복지정책에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등 직접세에 누진적으로 부과되는 사회복지세 도입도 가능할 것이다.

대도시 시내버스 첫차는 새벽 4시에 떠난다. 두세 번째 정거장부터 첫 버스는 만원이다. 모두 나이 드신 어른들이다. 다들 어디 가시는가? 모두 청소하러 가신다. 전국에서 40만 명의 노인이 병원 청소, 학교 청소, 건물 청소하러 가신다. 참 고단한 삶이다. 노후에 최소한 의식주 걱정을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우리 국민은 국가의 그런 책무를 위한 것이라면 정의로운 증세에 동의할 의향이 충분히 있는 자랑스러운 국민이다.

2013. 10. 4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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